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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7일 일요일

죽음예화, 신부들은 일찍 죽을수록 좋아

신부들은 일찍 죽을수록 좋아
 
과자와 사탕을 한아름 사 가지고 할머니 수녀님들이 모여 사시는 수녀원을 찾아갔다.
하나님의 딸로 사시다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할머니 수녀님들만 계신 곳이라 손자 같은 신부가 찾아가면 어찌나 좋아들 하시는지.

나이가 많아지면 어린아이 같이 된다고 하더니
하나님께 봉헌된 생활로 늙으신 분들이라서 그런지 더욱 어린아이 같은 모습들이다.
나이 많은 할머니 수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 신부님들은 일찍 죽는 게 좋아요.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신부생활 오래하면 할수록 유혹도 많이 당하고 어려움도 많이 겪고
때로는 잘못되는 일도 있잖아요
그러니 신부 되어서 착한 일만 많이 했을 때 죽는 게 좋지요
서품 받고 나서 바로, 몸도 마음도 깨끗할 때 죽으면 더 좋구요."
연세 높으신 할머니 수녀님이라 많은 일을 보고 느끼셨기에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된다.

"수녀님, 저는 더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신부 되어서 지금까지 신부다운 신부로 잘 살지 못했거든요
좋은 일 좀 해놓고 죽어야겠어요. , 좀 더 살아도 되죠?"
 
이상각,나 그리고 그대들의 뒷모습


2017년 9월 16일 토요일

죽음예화, 내가 살아야 할 이유



쿠쉬너 소령은 미국인 군의관이었다. 
그의 포로생활 회고담은 [절망]과 [죽음]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는 1967년 월맹군의 포로가 되었다. 지독한 학대와 영양실조로 체중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27명의 미군중 10명이 죽어갔다. 죽은 병사중 로버트라는 하사관이 있었다. 그는 해병특공대 출신으로 억세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소령이 로버트 하사를 처음 보았을때 비사상태의 다른 포로들에 비해 그는 유난히도 생기가 넘쳐흘렀다. 체중은 40킬로 이라로 떨어져 수수깡처럼 말라있었지만 눈은 빛나고 중노동을 잘 곁뎌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희망때문이었다.

교활한 월맹군측은 포로들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하여 말 잘 듣는 미군 포로 몇명을 석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다음번 석방자는 로버트가 될 것이라고 했다. 석방에 대한 의망이 로버트 하사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극복할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희망은 육체적,생물학적 한계마저 극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6개월이 되었지만 월맹군측은 그를 석방시켜 주지 않았다. 1개월을 더 기다렸으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월맹군 장교의 태도는 더욱 냉담해졌다. "다 틀렸구나!" 생각한 그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후 군의관에 품에 안겨 죽었다. "어머님, 아버님. 정말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바바라 당신을 용서하오." 이것이 병사의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로버트는 질병때문이 아니고 절망때문에 죽었다고 군의관은 말하고 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며 앞으로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을때 그는 마침내 죽고 말았다."고 쿠쉬너 소령은 회고하고있다.


빅터 플랭클은 유명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이다. 
나치스에 의해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갇히게 되었다.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람들은 죽어갔다. 몸에 상처가 있거나 노동력이 없어진 유대인들은 모두 가스실로 보내졌다. 이가 득실거리고 이로인한 발진티푸스로 또많은 유대인들이 죽어갔다.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몸이 건강해서가 아니고 살아남아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중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개처럼 살았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간의 존업성을 지키며 살았다. 공통적인 것은 살고자하는 의지를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수용된 이들 유대인들 가운데 닥터 라는 되가 외과의사가 있었다. 하루는 그가 밝은 얼굴로 프랭클 박사를 찾아와 간밤에 꿈을 꾸었다고 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추수감사절에 연합군이 진격해와 석방되는 꿈이었다. 이꿈을 꾼 후로 그는 마치 충실한 식사를 한 사람처럼 원기왕성하고 명랑해졌다. 수개월이 지나고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나 연합군의 소식은 감감했다. 어느날 밤 그 닥터는 프랭클 박사에게 "다 틀린거야... 헛된 꿈이었어." 라고 힘없이 말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하게 열이 오르더니 수일만에 죽고 말았다. 자유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과 희망은 닥터로 하여금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원기왕성한 삶을 살게 해 주었지만 기다렸던 그날이 훨씬 뒤로 물러가 버리자 그를 유지시켜 주었던 정신적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이처럼 절망감은 인간을 병들거나 죽게 한다. 정신의학자들은 이에 대한 많은 근거를 갖고 있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우리를 짖밟고 개가를 부를때 절망감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저희는 풀과 같이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이이로다}라고 하시고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라고 하신다. 유한한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변치않은 소망을 주신다. 불치의 병이라는 선고를 받았을때 인간은 절망하며 이 절망감 때문에 병을 극복할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어떤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주안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은 우주 최대의 희망이다.





죽음예화, 죽음도 손 든 루터의 기도



지금으로부터 4백년전의 일이다.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가 당시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할 때,
그에게 오른팔과 같이 힘을 합께 하돈 동역자 프레드릭 니코니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갑자기 심한 병이 들어 도저희 소생할 가망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느낀 니코니우스는 떨리는 손으로 친구요 주의 일을 합께 하는 동역자인 마틴 루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멀리서 그의 편지를 받아들은 루터는 깜짝 놀랐다. 
도저희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곧 바로 루터는 병석에 누운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구여 나는 자네가 더 살것을 하나님 이름으로 명령하네. 나에게 있있어서 교회를 개혁하는데 자네가 필요하니 주님은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나로 하여금 듣도록 하지 않을 걸세. 자네가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나의 뜻이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네."

임종을 앞둔 니코니우스는 루터의편지 내용을 전해 듣고 얼마후 다시 소생했다.
루터의 확신에 찬 기도와 신념에서 죽음 조차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6년동안 루터와 더 일을 하다가 주님품으로 돌아 갔다. 

우리가 생의 목표를 하나님께 일치시켜 놓고 그것을 위해 살아 간다면 
우리도 루터처럼 그런 자신있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옥한옴 목사 제공--




죽음예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크리스챤인 한 의사가 중병에 걸린 어떤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환자가 "의사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셨지요. 이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예화,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관



 죽음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이 먼저 느끼는 것이 두려움이다. 
나는 가끔 죽음과 마주 서 있는 환자를 방문하게 된다. 대부분 말할 수 없는 큰 고통과 함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할 때 그것이 조만간 나의 것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른다. 거기에다 한 생을 살아오면서 이래저래 지은 죄도 많은지라 하느님 심판대에 나서기란 참으로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되도록이면 고통이 적고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난달에는 내게 가장 오래된 친구가 죽었다.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는데, 잠시 앓고 가기 전날까지도 정신이 맑고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참으로 선하게 살다가 선종한 것이다. 그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 영전 앞에서 고인을 위해 기도드릴 때 나는 그가 이미 하늘나라에 있으리라 믿고 나 역시 남은 생애를 선하게 살다가 선하게 죽을 수 있게 해 주십사 빌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이 마셔야 할 쓴 잔이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할 수만 있다면 면하고 싶다고 하신 그 고뇌의 잔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하느님은 왜 인간에게 이 죽음의 굴레를 씌우셨는가. 성경에 의하면 죽음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려 죄를 범함으로써 초래된 결과이다. 

 핵심 문제는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끝인가, 아니면 저승 삶의 시작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 과학적 실증을 통한 답을 줄 수는 없다.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은 현세 삶의 끝일지언정 그것이 만사를 무(無)로 돌리는 종말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도신경 말미에서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바오로 사도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함과 그것이 없으면 우리 믿음도 헛되다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면서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3)라고 천명한다. 이 믿음에 따르면 죽음은 우리를 죄와 이로 말미암은 온갖 고통과 불행, 인생의 질고로부터 해방시켜 복된 생명으로 옮겨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감'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같은 가르침의 근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파스카 신비에 있다. 믿는 이에게 죽음은 파스카 신비의 구현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죽음을 쳐 이기셨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셨다. 여기서 세상이란 예수님의 구원이 없었다면 결국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그 세상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의 관문'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어떤 이는 '죽음은 아직 펴보지 않은 책과 같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책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기쁨과 행복, 사랑과 평화, 빛과 생명을 가득 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생각은 죽음을 너무 미화하는 것은 아닌가. 미화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사람이 되어 오시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죽음을 달리 볼 수 있다. 사랑은 파괴하지 않고 건설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그렇다면 하느님이 사랑을 다하여 당신 모습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신 인간을 죽음으로 끝나게 버려두실 수는 없다. 사도 바오로는 죽음 뒤에 우리가 누릴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 참되고 아름답고 복된 새 생명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의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도 간혹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여전히 두렵고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이요 고뇌일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할 것이다. 이것은 살고 싶은 인간 본성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결국 당신 사랑과 그 사랑이 베푸는 죄의 사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이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죽음에 대한 좋은 준비는 나날이 이 믿음을 깊이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음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특히 가난한 이, 병든 이, 고통 속에 갇힌 이 등을 형제적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본인이 깨닫든 못 깨닫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죽은 다음 분명하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를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를 사랑한 것이 당신을 사랑한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마련하신 나라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 준비이다.



죽음예화,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D. L. 무디(Moody)라고 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맡고 있던 젊은이들은 거의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데
유독 한 청년만은 고집을 부리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무디 선생님나는 서부로 가야합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몇 일 후에 이 젊은이가 몹시 아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무디 선생은 병원에 찾아가서 기도해 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간곡히 부탁했더니, ‘무디 선생님나는 이대로 죽지 않습니다전에 말한 대로 서부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음에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하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몇 일 후에 건강을 회복해 가지고 찾아와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무디 선생은 다시 어깨에 손을 얹고 간곡히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화를 버럭 내면서 무디 선생의 손을 뿌리치고 

"무디 선생님내 영혼 구원에 대해서 다시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제가 다시 돌아와서 결심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그러나 그 전에는 절대로 안됩니다안녕히 계십시오" 

그 젊은이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무디의 마음에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그 날 밤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깨어 일어나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았더니그 청년의 부인이 울면서 무디 선생님빨리 좀 저희 집에 가 주세요’, ‘내 남편이 몹시 아픕니다빨리 좀 가주세요’, 무디는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당신의 남편은 오늘 오후 마지막 거절의 말을 했습니다이미 위험선을 넘어 섰습니다내가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자가 울면서 간청하기 때문에 옷을 입고 따라갔습니다
그 집 계단에 올라가는데그 청년이 침대에 누워서 눈을 번쩍 뜬 채 의식을 잃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늦었어너무 늦었어!(Too late! Too late!)" 

하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꼭 쥐어주며성경을 읽어주고 기도를 따라 하라고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너무 늦었어너무 늦었어!’ 하는 말만 되풀이 하다가정신을 못 차린 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보라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오늘,지금이 구원받을 기회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죽음예화, 죽음 앞에 섰을 때의 후회


프랑스의 미술 전문 잡지인 '일뤼지옹'(Illusion)지에 
중세의 귀부인이 화장하는 그림이 실렸습니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채 거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겉모습과는 달리 
흉측한 해골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늙고겉모습을 치장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거짓된 삶을 속일 수 없다는 엄숙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사회학자 토니 캄폴로는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루지 못한 업적을 바라보며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고 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장래에 있을 죽음의 순간을 잊고 외형의 업적을 이루는 데 인생을 허비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감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요즘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진실을 버린 채 눈앞에 보이는 업적만을 좇아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죽음예화, 내가 쓰는 유서

어느 신학교교수가 학생들에게 
내일 죽는다라는 가정을 하고 유서를 써 보라고 했습니다
변호사를 통해 재산 분배에 대해 써 놓는 그런 유서가 아니라,

자신이 죽기 전에 남기고 싶은 중요하고 유일한 말이 무엇이냐

라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내 삶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의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 마음대로 살았던 많은 날들이 덧없이 느껴집니다
후회하고 회개해도 나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이제 남은 삶을 최대한 활용해서 알차게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일 것입니다하나님 앞에 불려 갔을 때 하나님이 나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불러 주신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앞으로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첫째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둘째육신의 움직임이 가능할 때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해야겠습니다
셋째세상 것에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 필요 없는 것어쩌다 필요한 것 같아 보관하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겠습니다
넷째세상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겠습니다
다섯째죽을 때 웃으며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하겠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순교나 위대한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주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습니다남은 인생을 주님께 드리는 것만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아마 내가 남길 유서는 하나님감사합니다’ 가 요지일 것입니다.




[죽음예화] 지옥에 안가는 법

아름다운 죽음의 안내서에 보면 사람이 죽을 때는장갑을 끼었다가 벗을 때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갈 때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데 그 때에 현세와 내세를 동시에 보며 신비의 세계를 말해준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던 17세 난 소년은 죽기 직전에 베드로가 보인다.
그 옆에 빛나는 분은 누구냐’ 고 엄마에게 묻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하니까

"큰일났다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엄마는 지옥 가겠다"

고 걱정을 하다가 
"엄마나는 먼저 천국에 갈테니 엄마는 나중에 오세요" 
하며 천사 같은 얼굴로 세상을 떠나더랍니다.

김연준 씨란 분은 세 회사를 경영하는 분인데 
간암 말기에 접어들면서 온 몸이 굳어져 말을 못했고
누워서 무릎을 세운 채 와들와들 떠는데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무엇이 그렇게 무서우냐고 했더니,

 ‘지옥에 갈까봐요’ 

그러더랍니다그래서 지옥에 안 가는 법을 가르쳐 드렸더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온 몸이 풀리면서 화평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는데 
숨을 거두기 전에 빛이 보인다고 하면서 
지옥에 안 가는 법을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거두었습니다.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2017년 8월 12일 토요일

[죽음 예화]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기발한 방법


 
죽고싶나요??
 
 
가장 먼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하루동안 아무것도 먹지 말아보세요.
배고파 죽습니다.
 
죽지 않았다면 앞선 하루동안 못 먹었던 음식을 쌓아 놓고 다 먹어 보세요.
배터져 죽습니다.
 
이것두 안되면 하루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아 보세요.
심심해 죽습니다.
 
그래두 안 죽으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일에 맞서서 두배로 일해 보세요.
힘들어 죽습니다.
 
혹시나 안 죽으면 천원만 투자해서 즉석복권을 사세요.
그리곤 긁지 말고 바라만 보세요.
궁금해 죽습니다.
 
잠시 후 죽을 랑 말랑 할 때 긁어 보세요.
반드시 꽝일 것입니다.
그러면 열 받아 죽습니다.
 
그래도 죽고 싶다면 홀딱 벗고 거리로 뛰쳐 나가 보세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일수록 좋습니다.
얼어 죽기 보다는 쪽 팔려 죽습니다.
 
이상의 방법으로도 죽을 수 없다면
아직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있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정말)
 
 

2017년 8월 9일 수요일

[죽음예화] 품위 있는 죽음

품위 있는 죽음
 
사람은 <품위 있는 삶 life with dignity>을 살기 위하여 힘씁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가정, 좋은 문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품위 있는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품위 있는 죽음 death with dignity>에 대하여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덜커덕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음이 절박하게 찾아오면 그만 당황하고 좌절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삶에 품위가 있어야 하듯, 죽음에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경우에는 1960년대부터 죽음학과 임종 정신의학(thanatological psychiatry)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 죽음학이 개설되어 있다고 합니다.
 
죽음학이 다루는 문제는 임종을 맞은 사람,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과 그 가족들의 정신적 치료,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 죽음에 대한 각 종교의 이해, 자살, 낙태, 사형제도, 안락사 등 죽음과 관련된 사회 문제와 그 법률 문제, 죽음에 대한 문학, 음악, 회화에 대한 연구, 죽음에 대한 관점과 태도, 죽음에 대한 극복 방법의 역사 등 광범위합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임종에 이르면 모든 일가 친척들이 모여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유언도 하고, 울기도 하고, 임종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의 풍조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품위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만, 품위 있는 죽음을 맞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거나, 노환으로 병들었다 하면 곧 바로 병원에 갇혀 주사 바늘을 꼽고 누워서, 자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고,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도 통제된 상태에서, 실험실의 개구리 마냥 약과 주사로 꼴깍 꼴깍하다가 죽습니다. 죽고 나면 곧바로 춥고 어두운 냉동실에 얼렸다가 집에 가보지도 못하고, 곧장 묘지나 화장터로 갑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얼마나 을시년스럽고, 비인간적입니까? 얼마나 삭막합니까? 죽어 가는 사람의 실존적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나중에 죽을 때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나는 그렇게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죽음학이며, 임종 정신의학입니다.
 
품위 있는 삶만큼 품위 있는 죽음도 중요합니다.
 


<참고:부위훈, 전병술 역, 죽음, 그 마지막 성장, 청계, 2001>

세 가지 실패

옛날 한 청년이 스승을 찾아가 지혜를 구했습니다. "저는 꼭 성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성공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스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실패가 있단다." 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