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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9일 목요일

[가정예화] 아버지와 젓가락


 
내가 막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시골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시러 서울에 올라오셨다.
당신께서는 몇 달만에 보는 아들에게 뭔가 사 먹여야 겠다는 생각에 근처 식당에 데려 가셨다.
그곳은 학교 부근 중국집이었는데,아버지께서는중국집이 처음이셨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노친네가 어찌 중국집에 가 본 적이 있었겠는가?
우리는 그 집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먹었는데,
짜장면을 한 손으로 비비지 않고 두 손으로 섞는 모습이 영 못 마땅하셨는 지

"사람이 점잖지 못하게 그게 뭐냐?"고 하셨는데 
난, "편하면 되지" 하며 고집을 부렸다.

그런 나를 주름진 눈으로 힘없이 가만히 보시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내 나이 일흔을 지나, 그때 내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더 늙은 아버지가 되어 보니 
내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그립다.

'그때 거기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이 비합리적 아니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렇게 한다고 대단한 큰 일이 일어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요즘 와서 아버지의 그 슬픈 눈이 자꾸만 떠 오른다. 

- 김형석 교수의 회고록 중에서  




2017년 9월 3일 일요일

[가정예화] 나무 그늘

나무 그늘
 
아주 오래 전 …
그러니까 내 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그 나무는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그늘은 아주 컸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그곳에서 뜨거운 햇살을 피해 여름을 보냈으며
겨울엔 그 나무가 저 대신 눈보라와 바람을 막아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것이 나무의 당연한 본분이라 생각하고 나무의 배려 속에서 자랐습니다.
나무는 시간이 지날 수록 예전의 위용은 간데 없고 줄기는 가늘어졌으며
잎은 완연히 바래졌습니다. 새들도 더 이상 나무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느새 저를 키워준 나무 옆에서 더 커버린 또 다른 나무로 성장했습니다.
저 또한 저를 키웠던 나무처럼 제 그늘 속에 조그만 묘목 두 그루를 심은 뒤에야
그 나무가 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당신도 힘드시면 제게 기대세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 아버지, 당신도 이제 제 그늘에 오셔서 쉬십시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가정예화] 우리 아버지야

더러운 아이 -- 좋은생각

 
검게 그을린 얼굴에 여드름 투성이인 그 친구는 늘 외톨이었다.
옷도 유행에 뒤쳐진 단벌뿐인 그에게서 나는 역겨운 냄새를 아이들은 무척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그를 구박하고 메스꺼운 표정을 지으며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냈다.

그래도 항상 밝은 얼굴로 나를 대하던 그는 지각이 잦아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더러운 놈, 냄새풍기지 말고 아무도 없을 때 좀 일찍일찍 다니면 안 되냐?"
고 면박을 주었다.

뉴스에서 불볕더위라는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어느 날이었다.
여름방학이었지만 고입시험을 앞둔 우리는 보충수업을 받았는데 그날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나는 허둥지둥 엄마 차를 얻어타고 학교 근처에 내려서 학교를 향해 언덕길을 뛰어 올랐다.
헉헉거리며 급히 뛰어가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뒤에는 내 또래의 한 아이가 냄새나는 수레를 묵묵히 밀고 있었다.

"또 지각이잖아. 그만 가래도"
"아니에요. 십오분밖에 안 늦었어요.마저 끝내놓고 가도 괜찮아요"

그순간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바로 냄새나는 아이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본 그가 멋쩍은 듯 말했다.

"우리 아버지야" 

그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계속해서 수레를 밀었다.
그날 나는 지각한 벌로 매를 맞았는데도 왠지 흐뭇했다.
그뒤로 나는 그의 냄새를 싫어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냄새나는 그 아이의 미소를 잊지 못할 것이다.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 되었지만 
그 친구는 지금도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며 살고 있으리라. 
 <좋은 생각.98.1>  


2017년 8월 22일 화요일

[가정예화] 아버지의 슬픈 눈

아버지와 젓가락 -- 김형석

 
내가 막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시골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시러 서울에 올라오셨다.
당신께서는 몇 달만에 보는 아들에게 뭔가 사 먹여야 겠다는 생각에 근처 식당에 데려 가셨다.
그곳은 학교 부근 중국집이었는데,아버지께서는중국집이 처음이셨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노친네가 어찌 중국집에 가 본 적이 있었겠는가?

우리는 그 집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먹었는데,
짜장면을 한 손으로 비비지 않고 두 손으로 섞는 모습이 영 못 마땅하셨는 지

"사람이 점잖지 못하게 그게 뭐냐?"

고 하셨는데 난, 

"편하면 되지" 

하며 고집을 부렸다.
그런 나를 주름진 눈으로 힘없이 가만히 보시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내 나이 일흔을 지나, 
그때 내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더 늙은 아버지가 되어 보니 내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그립다.

'그때 거기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이 비합리적 아니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렇게 한다고 대단한 큰 일이 일어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요즘 와서 아버지의 그 슬픈 눈이 자꾸만 떠 오른다. 

- 김형석 교수의 회고록 중에서


2017년 8월 19일 토요일

[공감 예화] 못생긴 나의 도장

못생긴 나의 도장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도장이 있다. 이미 20년이나 지난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려면 입학원서에 찍을 도장이 필요하다며 선생님께서 도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교육자 가정에서 7남매를 연이어 대학교육까지 시켜야 했던 나의 아버지로서는 도장 하나 남들처럼 제대로 새겨 주기도 경제적 형편이 어려웠을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아버지께서 쓰시던 헌 도장을 깎아 버리고 손수 서툰 솜씨로 밤새워 도장을 파 주지 않으면 안 되셨다.
 
친구들은 모두 도장 전문가가 새긴 번듯한 도장으로 세련되게 도장을 찍는데, 나는 손때 타서 거무죽죽한 나무 도장을, 그것도 잘 쓴 글씨가 아닌 비뚤어진 글씨의 보잘것 없는 도장을 꺼내 누가 볼세라 어디서 훔쳐 온 도장마냥 살짝 찍어야만 했다.
 
남이 가진 것보다 내 것은 항상 못하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렇게도 부끄럽고 서러웠던지….
 
차차 철이 들면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새겨 주신 그 도장은 어느 유능한 예술가가 새긴 조각품보다도 더 훌륭하고 귀중한 것이 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나의 못생긴 도장은 각종 진단서나 서류에 유용하게 쓰여지면서 사용하면 할수록 섬세하신 아버지의 한없이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도장을 찍을 때마다 못생긴 도장을 부끄러워하며 서러워했던 철없던 시절의 나의 행동에서 아버지의 성실하시고 검소하신 삶을 부끄러워했던 불효를 느끼고 마음이 참 아팠다.
 
사연을 모르는 주위의 많은 이들이 내 도장을 보며, 󰡒과장님! 돈 벌어 어디 쓰십니까? 신분에 맞게 좋은 걸로 다시 파세요.󰡓 하는 충고도 하고, 또 실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게 아주 값비싼 고급 도장을 선물로 사 온 분도 있었지만 나는 오로지 이 못생긴 도장만을 사용한다. 쓰지 않으면 배은망덕하기라도 한 것 같아서.
 
최근 우연히도 30년 만에 그 도장을 아버지께서 보실 기회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밤을 새시며 손수 파 주셨던 이야기며, 딴 애들과 비교해 너무 보잘것없는 도장이라 느끼며 부끄럽고 서러워 울었던 지난 날의 이야기를 해 드렸다.
 
그 후, 아버지로부터 영문 모를 소포가 하나 왔다. 궁금해하며 열어 보았더니 아버지께서 수십 년을 쓰시던 상아 도장을 깎아 내 이름을 예쁘게 새긴 도장이 들어 있었다.
 
그 도장과 함께 곱게 접어 넣어 두신 짧은 글.
 
󰡒사랑하는 순옥아! 아버지가 새겨 준 것이라며 30년이나 간직해 온 너의 못생긴 도장을 보니, 키울 때 잘해 주지 못하고 고생만 시켰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 마음이 많이 아프더구나. 그 도장은 네가 계속 쓰기에는 이제 너무 보잘것 없는 것이 되었지. 이것은 아버지가 평생을 써 왔던 도장인데 이제 정년 퇴임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쓸 일이 없어서 다시 깎아 네 이름을 새겨 보았다.
 
아버지 생각하며 평생을 유익하게 써 다오.󰡓
 
나는 그 소포와 편지를 받고 그만 울어 버렸다. 그 도장 속에 새겨진, 내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든 고생과 설움을 읽으며 소리내어 울었다.
 
그 때에 비하면 너무나 경제적으로 부요해지고 풍족한 요즘의 나의 삶을 보며 나는 내 사랑하는 딸들에게 평생을 두고 간직할 만한 정성어린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날이면 날마다 공부, 공부 하며 살아야 하는 그 아이들에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이 삭막한 엄마가 동심어린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반성해 본다.
 
--낮은울타리 91년 9월호에 실렸던 이야기


세 가지 실패

옛날 한 청년이 스승을 찾아가 지혜를 구했습니다. "저는 꼭 성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성공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스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실패가 있단다." 청...